인샬라

2021. 1. 21. 16:51Yoonguevara in Br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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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샬라는 '신의 뜻대로' 혹은 '알라의 뜻대로'라는 의미이다. 나에게 인샬라는 물음표를 잔뜩 띄워 던진 말에 게으르게 돌아왔던 부메랑이었다. 이번 여행 첫 숙소에서 건물 전체의 인터넷이 끊겨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었을 때, 예약한 투어 날짜의 일기예보가 먹구름과 빗방울이었을 때, 에어비엔비 호스트를 처음 만나던 날 왜 늦게 왔냐고 물었을 때 '어쩌겠어.'라는 표정과 인샬라는 함께였다. 그래서 인샬라를 우리나라의 '내가 그런 거 아니야.'정도의 핑곗거리로 생각했다.

 "인샬라."

 배낭을 메고 이스탄불을 떠나려는 나에게 호스트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마지막으로 건넨 인사도 인샬라였다. 그때 알았다. 인샬라는 핑곗거리가 아니란 걸. 깊이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표정과 몸짓이 나의 여행이 행복하길 바란다고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스탄불에서의 따뜻함을 품고 터키 서남쪽의 도시 이즈미르로 향했다. 11시간 동안 버스를 탔고 오전에 출발한 버스는 자정이 가까워 올 때쯤 도착했다. 

 이즈미르는 이스탄불과 느낌이 많이 달랐다. 이스탄불은 엔틱한 원목 가구와 장식으로 인테리어 한 카페라면 이즈미르는 노출 콘크리트와 레일 조명으로 장식된 카페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터키에 왔을 때에는 이스탄불 다음 에페스를 가기 위해 셀축에서 머물렀었다. 이스탄불 다음 에페스라는 점은 같지만 이번에는 전에 와보지 못했던 이즈미르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이즈미르에서 셀축으로 1시간, 셀축에서 10분 정도 이동하면 에페스에 도착할 수 있다. 

다음날, 날씨는 맑고 적당히 더운 한국의 5월 같았고 곧장 에페스로 향했다. 에페스는 고대 그리스 때 만들어진 식민 도시로 부유했던 무역 도시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에베소, 라틴어로는 에페수스, 그리스어로는 에페소스 지금의 터키는 에페스라고 부른다. 황제의 분수와 신전, 원형 극장인 오데온과 켈수스 도서관, 성매매가 이루어졌던 유곽과 헤라클레스의 문을 기준으로 나뉘는 서민들과 귀족들의 생활구역을 비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찾은 에페스는 여전했고 몇 년 만에 다시 찾았다는 감격에 발이 빨라졌다. 그렇게 매표소를 지나 오데온을 앞에 세우고 카메라를 들었을 때 땅이 흔들렸다.

"유적 옆에 서있지 말고 나오세요!"

 한쪽 손으로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여행객이 크게 소리쳤다. 땅이 흔들렸던 건 지진 때문이었고 지진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무서웠다. 하지만 그 무서움도 배낭 여행자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은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나라 돈 13000원 정도의 입장료는 지진이 잠잠해진 고대 에페스로 빠져들도록 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1시간 반 넘도록 에페스에 빠져있었고 저녁시간이 돼서야 다시 이즈미르로 돌아왔다.

'부상자 100명 이상, 사망자 7명.' 
 이즈미르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TV에서 본 화면이다. 내가 느꼈던 지진은 7.0의 강진이었고 건물이 무너져 많은 사람이 다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휴가를 떠나 집을 비웠던 숙소 호스트의 문자가 왔다.
'괜찮아? 지금 지진 때문에 너무 위험해. 여진이 없을 때까지 밖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짐 때문에 숙소에 도착했을 때 호스트의 말처럼 여진을 느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에페스를 갈 때 지나쳤던 식당가로 향했다. 거리에는 가족과 함께 밖으로 대피한 사람들이 있었고 높고 큰 건물이 없는 식당가에도 이미 많은 이즈미르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있었다. 가벼운 저녁거리와 맥주를 시켜서 뉴스를 보면서 먹었다. 계속 늘어가는 부상자와 사망자를 보며 나는 안타까워했고 그 모습을 보던 한 아저씨가 말을 건넸다.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요. 터키를 여행 중이에요."
"오늘 지진이 있었어. 그래서 건물이 무너졌고 많은 사람이 다쳤어."
"네. 알고 있어요. 에페스에서 저도 지진을 느꼈어요."
"여행 중인데 이런 일이 있다니. 지진이 더 올 수도 있어 조심해야 돼."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사람들이 다쳐서 마음이 아파요."
나의 말에 아저씨는 걱정이 가득하고 희망을 바라는 눈으로 말했다.

"인샬라."

 인샬라는 내가 생각했던 '내 탓 아니야. 신의 뜻이야.'나 '내가 그런 거 아니야.'같은 우리나라의 핑곗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신은 길을 정해주는 사람이었고 항상 자신에게 가장 좋은 길을 알려준다고 믿는 것이었다. '신의 뜻대로' 뒤에 '우리의 신이 좋은 길로 안내할 거야.'라는 의미가 숨어있는 것이었다. 지진으로 다치고 아픈 사람들, 다시 올 지진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인샬라는 힘든 순간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기둥이었고, 진심으로 위해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날 처음 아저씨의 인샬라에 나도 진심으로 모든 사람이 안전하기를 바라며 대답했다.

"인샬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인샬라라는 말의 깊이를 이해하게 되었고 걸을 때면 항상 함께였던 음악은 유난히 듣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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